[언론보도] [기고]복지·경제 민주화보다 지식창조사회 전환이 우선(조선일보, 2012.9.10)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이병기 교수]
지식창조시대 도래했지만 우리는 제대로 대응 못해
중화학공업, 전자산업 등 산업화 비결이 이젠 장애로
산업사회적 구태 혁파 없이는 제로섬게임밖에 되지 않아
우리나라가 G20 회의 개최를 앞두고 한창 들떠있던 2010년 11월 8일,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특집에서 '기적은 끝났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이 칼럼은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0개국을 맞이하면서 불편한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고 전제하고 "그것은 경제 기적을 낳은 전략이 수명을 다해가고 있고, 이것을 대체하는 새 전략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라고 썼다. 그리고 "한국은 농업경제를 산업력으로 전환함으로써 고속 성장을 했는데 그 성장을 지속하려면 어떤 근본적이고 힘든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에는 남의 잔칫상에 재를 뿌리는가 싶어 못마땅했지만, 한국의 산업 현실을 객관적으로 짚어주는 정확한 진단이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국가적 노력을 총집결하여 전통적인 농경사회를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한강의 기적'이다. 그래서 철강·자동차·조선 등 중화학 산업이 세계 속에 우뚝 서게 되었고, 반도체·휴대전화·디스플레이 등 첨단 전자산업이 세계시장에서 앞서가게 되었다. 그리고 산업화의 성공을 밑거름으로 민주화가 급진전했는데 그 와중에 다음번 기적을 일구어낼 동력을 상실했고 방향감각마저 잃어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지식 창조 시대가 도래했다. 1970년대에 퍼스널컴퓨터(PC)가 출현한 이래 지식의 역할이 꾸준히 확대되어 왔고, 산업사회의 중심축이 지식 창조 산업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5년 전 애플의 아이폰 출현과 함께 '스마트 빅뱅'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식 창조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997년 IMF 사태 이후에도 여전히 '정부 주도, 제조업 중심'의 산업시대 패러다임에 젖어있었고,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산업화 성공에 안주하면서 민주화 성공으로 다양하게 분출하는 국민과 유권자들의 욕구 충족에 전전긍긍했을 뿐이다. 산업자원부를 지식경제부로 개칭하는 정도의 변죽을 울렸을 뿐 정부 구조와 운영 개혁, 공무원의 의식 전환, 산업 구조 개편 등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근본적인 변혁이 없었다.
이제 지식 창조물은 글로벌 산업 경쟁의 최전선에 포진하고 있다. 지식 창조 사회로 전환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업이 되었다. 이를 성사시켜야만 중화학공업·전자산업의 두 엔진과 함께 지식 창조 산업이란 세 번째 엔진을 가동해 미래 경제를 견인할 수 있다.
문제는 산업사회적 구조와 의식의 혁파 없이는 지식 창조 사회를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산업화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비결이 다음 단계의 진화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정부가 소프트웨어나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했음에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은 제조산업적 방식으로 지식 창조 산업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두뇌로 만들고 인터넷을 통해 유통하는 지식 창조물을 기계로 만들고 물품 유통망을 통해 유통하는 제조 상품과 같은 방식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지식 창조 사회를 향한 패러다임 전환이 바로 월스트리트저널이 지적했던 '어떤 근본적이고 힘든 변화'이다. 이것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상응하는 국가적 결집 노력과 대통령의 강력한 추진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대변혁이다. 요즘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복지와 경제 민주화 공약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제로섬게임밖에 되지 않는다. 지식 창조 사회로 패러다임 전환을 추진하여 산업사회적 구태(舊態)를 혁파하고 지식 창조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함께 이루어나갈 때 우리나라는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 지난 50년간 일구어낸 산업화·민주화 기반 위에 '지식·문화 산업 강국(强國)'의 새 세상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