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수분지족(守分知足), 김성철 교수(문화일보 2009.3.5)
최근 들어 세상살이가 무척 힘들다는 생각에 늘 마음이 편하지 않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는 표현이 보다 더 정확할 듯하다. 사회에는 연쇄살인과 금품횡령 사건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정치판에는 폭력이 난무하며 행정은 비효율과 예산낭비로 우왕좌왕하고 있다. 도무지 세상살이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원인은 분명하다. 나라 전체적으로 원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천지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들은 죄다 아전인수와 부화뇌동하는 자들의 아우성이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빙자한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우리 국회에서 실종된 지 오래다. 그들을 지지한 적이 없는 대다수의 국민은 불쾌하고 분통이 터진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소수를 배려하되 최종 결정은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기본이다. 이번에 소수당이 되어 법안처리에 불만이 있으면 국민을 설득하여 다음에 다수당이 되어 다시 법을 고치면 된다. 다수당도 잘못하면 언제든지 소수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국민은 선거를 통해 여러 번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정치인 어느 누구도 국민을 무서워하는 이가 없어 보인다.
불과 1년 전 유권자들에게 간이라도 내줄 듯 고개 숙이던 국회의원들은 모두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자기 주장만 옳다며 반대의견을 듣는 귀를 닫은 지 오랜 것 같다. 국회의원은 법안을 발의하고 논의가 필요하면 하면 된다. 국민을 상대로 어느 법안이 더 타당한지 알리면 된다. 물론 타협이 이뤄지지 않으면 다수결의 원칙을 따라가면 된다. 어떤 법이든지 야당의 주장처럼 완전합의 통과는 불가능하다. 법안통과가 여야 완전합의로만 통과해야 한다면 대통령도 국민 모두의 지지를 받아야 되고 국회의원도 지역구민들의 만장일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애초에 불가능한 주장이다.
필자의 이런 생각을 ‘보수 꼴통’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진보주의를 자처하는 많은 이들이 진보는 선이고 보수는 악이며 가난한 자들은 피해자이고 부자는 가해자라고 규정한다. 보수의 주장과 논리는 국민을 기만하고 가진 자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만 한다. 그런데 진보라고 주장하는 정치인들 가운데는 필자 기준으로 상당한 재력가들이 적지 않다. 보수와 진보의 경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애매하고 자의적이라 혼란스럽다.
이를 명쾌하게 정의 내려준 책이 김훈의 ‘밥벌이의 고단함’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작동규칙을 받아들이고 순응하여 밥벌이를 열심히 하면 보수라는 명쾌한 설명이다. 그 논리에 따르면 필자는 보수가 될 수밖에 없다. 진보라 주장하는 많은 사람도 사실은 보수에 속한다. 진보가 비난하는 보수주의자가 사회 약자를 더 배려하는 경우도 많고 진보적 언론을 좋아하기도 한다.
명확한 절대 선과 절대 악의 구분선을 그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아군과 적군만이 존재하는 전쟁터와 같다. 중도세력은 기회주의자 취급을 받는 것이 고작이다.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지금 같은 사회 시스템에서 중용지도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보수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부자가 적어야 하고, 진보가 무조건 의로운 것이 아니라 가난해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착한 사람이 많아야 살기 좋은 사회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익명의 그늘에서 남을 비난하는 잘못된 인터넷 문화를 벗어나 실명으로 자기 주장을 펼칠 때 사회는 건강해진다. 인터넷 실명제가 되면 과거와 같이 권력으로부터 음습한 보복이 두렵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 공개적인 글을 쓰는 필자의 입장은 비판적인 글에 대한 정부권력의 보복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버 테러가 더 무서워 스스로의 글에 자기 검열을 한 적이 더 많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얼굴에 덧씌워진 남을 속이는 가면을 걷어내고 능력에 맡게 수분지족(守分知足)하며 살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김성철 / 서울대 교수·전자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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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원인은 분명하다. 나라 전체적으로 원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천지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들은 죄다 아전인수와 부화뇌동하는 자들의 아우성이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빙자한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우리 국회에서 실종된 지 오래다. 그들을 지지한 적이 없는 대다수의 국민은 불쾌하고 분통이 터진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소수를 배려하되 최종 결정은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기본이다. 이번에 소수당이 되어 법안처리에 불만이 있으면 국민을 설득하여 다음에 다수당이 되어 다시 법을 고치면 된다. 다수당도 잘못하면 언제든지 소수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국민은 선거를 통해 여러 번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정치인 어느 누구도 국민을 무서워하는 이가 없어 보인다.
불과 1년 전 유권자들에게 간이라도 내줄 듯 고개 숙이던 국회의원들은 모두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자기 주장만 옳다며 반대의견을 듣는 귀를 닫은 지 오랜 것 같다. 국회의원은 법안을 발의하고 논의가 필요하면 하면 된다. 국민을 상대로 어느 법안이 더 타당한지 알리면 된다. 물론 타협이 이뤄지지 않으면 다수결의 원칙을 따라가면 된다. 어떤 법이든지 야당의 주장처럼 완전합의 통과는 불가능하다. 법안통과가 여야 완전합의로만 통과해야 한다면 대통령도 국민 모두의 지지를 받아야 되고 국회의원도 지역구민들의 만장일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애초에 불가능한 주장이다.
필자의 이런 생각을 ‘보수 꼴통’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진보주의를 자처하는 많은 이들이 진보는 선이고 보수는 악이며 가난한 자들은 피해자이고 부자는 가해자라고 규정한다. 보수의 주장과 논리는 국민을 기만하고 가진 자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만 한다. 그런데 진보라고 주장하는 정치인들 가운데는 필자 기준으로 상당한 재력가들이 적지 않다. 보수와 진보의 경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애매하고 자의적이라 혼란스럽다.
이를 명쾌하게 정의 내려준 책이 김훈의 ‘밥벌이의 고단함’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작동규칙을 받아들이고 순응하여 밥벌이를 열심히 하면 보수라는 명쾌한 설명이다. 그 논리에 따르면 필자는 보수가 될 수밖에 없다. 진보라 주장하는 많은 사람도 사실은 보수에 속한다. 진보가 비난하는 보수주의자가 사회 약자를 더 배려하는 경우도 많고 진보적 언론을 좋아하기도 한다.
명확한 절대 선과 절대 악의 구분선을 그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아군과 적군만이 존재하는 전쟁터와 같다. 중도세력은 기회주의자 취급을 받는 것이 고작이다.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지금 같은 사회 시스템에서 중용지도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보수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부자가 적어야 하고, 진보가 무조건 의로운 것이 아니라 가난해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착한 사람이 많아야 살기 좋은 사회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익명의 그늘에서 남을 비난하는 잘못된 인터넷 문화를 벗어나 실명으로 자기 주장을 펼칠 때 사회는 건강해진다. 인터넷 실명제가 되면 과거와 같이 권력으로부터 음습한 보복이 두렵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 공개적인 글을 쓰는 필자의 입장은 비판적인 글에 대한 정부권력의 보복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버 테러가 더 무서워 스스로의 글에 자기 검열을 한 적이 더 많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얼굴에 덧씌워진 남을 속이는 가면을 걷어내고 능력에 맡게 수분지족(守分知足)하며 살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김성철 / 서울대 교수·전자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