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박영준,이종호,이창희 교수,"이러다 中 설계도 받아 납품하는 상황 올 수도"(조선비즈,2015.09.21)
[서울대 工大 교수 26명, 한국 산업의 위기 경고]
"선진국들 100년 쌓은 기술, 中 10년 만에 10배 많은 경험 쌓으며 따라잡아"
"서울대가 비싸서 못사는 장비, 중국 대학 실험실에는 발끝에 차일 정도로 많아"
인천 송도와 영종도를 연결하는 총 길이 21.38㎞의 인천대교는 국내 최장교(最長橋)이자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긴 다리로 2009년 완공됐다. 당시 건설 당국과 시공사는 "한국 건설의 저력을 세계에 알린 쾌거"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껍데기만 국산"이라고 말한다. 자체 기술이 부족해 초기 프로젝트 기획과 시스템 디자인 기술 등 핵심 분야는 모두 일본(설계)·캐나다(엔지니어링)·영국(투자 및 기술) 등 외국 기업에 맡겼기 때문이다. 인천대교뿐 아니라 수도권의 '랜드마크'로 통하는 제2롯데월드, 인천공항 고속도로와 연결된 영종대교를 지을 때도 모두 외국 기업에서 설계도서(設計圖書)를 사왔다.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에서 한계에 부딪힌 한국 산업 기술의 현주소를 서울대 공대가 낱낱이 분석해 '축적의 시간'이란 책을 펴냈다. 반도체·정보통신·해양플랜트·항공우주·빅데이터 등 각 분야 26명의 교수들은 각자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목에 칼이 들어왔다'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데워지는 물 안에 있는 개구리' 등의 표현을 써가며 한국 산업계의 위기를 경고했다.
이들이 반복적으로 거론한 문제는 산업계에 여전히 만연한 '기술 경시(輕視)' 풍조였다. 현택환 교수(화학생물공학)는 "한국 기업은 선진국에서 완성된 것을 가져다 쓰는 방식에 익숙해 기술 씨앗을 뿌리고 묘목을 키워 큰 나무로 성장시키는 경험을 축적하지 못했다"면서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마치 설악산에서 크게 자란 금강송을 그냥 캐오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고현무 교수(건설환경공학)는 "중국은 교량 설계업무를 담당하는 엔지니어가 20~30년 같은 일을 해서 경험을 쌓지만, 한국은 5~10년 정도 경력을 쌓으면 곧바로 영업 분야로 돌려 더 이상 경험 축적을 하지 못한다"며 현장의 문제를 지적했다.
한국이 외국 기술에 의존하는 사이 중국은 이미 '추격'을 넘어 '추월'을 눈앞에 뒀다는 진단이 쏟아졌다. 교수들은 '서울대는 비싸서 구매하기 어려운 장비가 중국 대학 실험실에는 발끝에 채일 정도로 많다' '칭화대(淸華大) 캠퍼스에서 수업 종료벨이 울리자 수많은 학생들이 넓은 도로를 꽉 채우며 다른 강의동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온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중국 하얼빈대는 전력전자 전공 교수가 서울대 해당 분야의 대학원생 숫자보다 많다' 등 자신이 경험한 사례를 소개했다.
한국에 건설된 발전소의 총 발전용량이 80GW(기가와트) 수준인데, 중국은 매년 새로 짓는 발전용량만 60~70GW에 달한다. 전 세계에서 나오는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논문 저자는 대부분 중국계고, 중국에서 나오는 논문 수도 한국의 10배 이상이다. 서울대 이정동 교수(산업공학)는 "산업 선진국들이 100년 걸려 쌓아온 기술을 중국은 10년 만에 10배 많은 연구를 진행하는 식으로 급격히 따라잡고 있다"며 "이미 해양플랜트·자동차·가전·휴대전화 등 거의 전 산업분야에서 중국이 세계 최초의 모델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종호 교수(전기정보공학부)는 "한국 반도체 산업은 이르면 7~8년 뒤 중국발(發) 위기에 맞닥뜨릴 것"이라고 했고, 이창희 교수(전기정보공학부)는 "이미 TV세트 부문에선 위협이 시작됐고 패널도 5년 안에 따라잡힐 수 있다"고 경고했다. 머지않아 중국이 독자적으로 구축한 설계도를 한국이 받아다가 생산해 다시 중국에 납품하는 상황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 공대 이건우 학장은 "한국은 선진국이 만들어놓은 핵심 기술을 빠르게 모방해 개량 생산하는 것은 잘하지만 개념을 새롭게 만들고 최초의 설계를 그려내는 역량은 턱없이 부족하다"며 "오랜 경험을 갖춘 선진국, 광활한 내수시장을 무대로 경험을 빠르게 쌓으며 추격하는 중국과 맞서려면 기업·정부·대학이 이제 벤치마킹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경험과 지식 축적을 지향하는 시스템과 문화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