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이혁재 교수, [기고]반도체 클러스터의 성공 조건(서울경제,2023.03.17)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세계 각국 정부는 반도체 공급망 주도를 위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지원법을 통해 반도체 생산 기업 유치를 위한 보조금·세액공제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경쟁국에 투자를 제한하는 조치를 추진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일본·대만 등도 반도체 기업 유치를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는 ‘반도체 굴기’를 위해 자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반도체 지원 사업 중에서 중요한 정책이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다. 반도체 클러스터란 반도체 개발을 위해 필요한 기업들이 가까운 지역에 모여 상호 협력과 경쟁을 통해 기술 혁신, 비용 절감 등의 시너지를 높이는 산업 생태계를 말한다. 대표적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미국의 실리콘밸리다. 인텔·AMD·엔비디아등을 포함한 많은 기업이 세계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 왔다. 미국이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확보한 주된 이유가 이 실리콘밸리의 효과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 제조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 반도체 지원법은 ‘반도체 제조 클러스터 조성’을 목표로 명시하고 있다. 일본도 구마모토 지역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어 반도체 재건에 나서고 있다. 일본은 TSMC 팹 건립 비용의 절반을 지원하며 러브콜을 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일본의 강점인 소재·부품·장비 산업을 포함하는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의 반도체 제조 클러스터 조성은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클러스터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면, 우리나라의 강점인 메모리 반도체와 파운드리 산업에도 힘겨운 경쟁 상대가 될 수 있다.
경기 남부의 막강한 반도체 생태계는 숫자로도 드러난다. 국내 반도체 기업의 71%, 종사자의 64%가 경기도에 집중돼 있으며 반도체 연구개발 조직도 1만7000개 이상 들어서 있다. 기업과 인재들의 집중은 글로벌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한국 전체 반도체의 75%, 세계 메모리 반도체의 28%가 만들어지는 경기도는 이미 세계에서 손꼽히는 반도체 생산기지이기도 하다. 반도체 업계가 모여 있는 지역 인근에 반도체 국가첨단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클러스터의 시너지 효과를 끌어올리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은 방심하는 순간 경쟁력을 잃고 뒤처지는데, 이러한 예는 수 없이 찾을 수 있다. 1980년대 일본에는 많은 반도체 회사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키옥시아·르네사스 정도만 남아 있다. 애플 컴퓨터에 사용되는 중앙처리장치(CPU)를 개발한 모토롤라, 1990년대까지 반도체 강자였던 HP같은 미국 회사들도 2000년대 들어서 경쟁력을 잃고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거나 다른 회사에 인수됐다.
현재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도 전쟁과 같은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던 메모리 반도체 기술도 미국 회사와 기술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이다. 반면 대만의 TSMC를 따라잡아야 하는 파운드리 사업에서는 시장 점유율 격차가 오히려 더 벌어지는 등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워졌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최고 성능의 무기가 필요하다. 특화 단지 조성은 전쟁에서 사용하는 훌륭한 무기를 제공해 주는 효과를 낸다. 수도권 국가첨단산업단지 지정이 기존 반도체 생태계와의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통해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길 기대한다.